인생에서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두루 겪어야 한다.
영원히 좋은 일만 생기는 사람도, 영원히 나쁜 일만 겪는 사람도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비극적인 상황에서 수많은 질문에 답을 구하고 의미를 찾는 것이다.
1장에서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비행기를 추락시킬까 봐 두려워했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했다.
뒷날 내가 적십자 항공 재난관리 팀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그 공포에서 의미를 찾으려 했던 것도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는지 모른다.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큰 계기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순간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가치 있는 대의명분을 만들기 위해 거액을 기부하건, 상점 점원에게 따뜻하고 친절하게 대하건, 지역 무료 급식소에서 자원봉사를 하건, 내 차 앞에 끼어들려는 차에 선뜻 양보를 하건 모든 순간 모든 일들에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살아 있다는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더러는 자기가 죽고 그 사람이 살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갈 때 자기가 뭔가 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살아남은 사람이 죽음을 막기 위해 뭔가 할 수 있었을 수도 있다.
젊은 사람이 죽고 나이 든 사람이 살아남은 경우 나이 든 사람은 늙은 내가 먼저 죽는 것이 자연의 순리인데 이를 거슬렀다며 자책하기도 한다.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뒤에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따라온다.
그래서 남은 사람들은 자기에게 스스로 벌을 가하거나 벌을 가해줄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기도 한다.
자책이나 원망의 길로 가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앞서도 잠시 언급했는데, 우리는 살면서 일어나는 일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패턴, 연결, 원인과 결과 등을 파악하려는 본능이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기 자신에게 해줄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이런 본능은 인간의 생존 방식이기도 하다.
만약 인과관계를 파악하지 못했다면 동료들을 잡아먹는 사자가 바로 옆에 있어도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치유를 시작하려면 모든 권능을 신에게, 세상에, 운명에 또는 자신이 믿는 어떤 대상에 돌려주어야 한다.
신을 향한 분노와 원망을 인정하는 것부터가 시작일 수도 있다.
내가 믿는 신은 우리의 분노와 원망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분이다.
때로는 정신적 스승에게 이야기를 터놓거나 차 안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요가를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거나, 베개를 마구 때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정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위안을 받을 만한 무언가를 찾아야 하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었는데 나만 살아 있다는 생각에 짓눌려 있다면 분노를 풀어놓는 순간 내가 죽었어야 한다는 생각은 틀렸음을 깨닫기 시작할 것이다.
매일의 일상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우리는 여전히 사랑하고, 웃고, 성장하고, 기도하고, 미소 짓고, 울고, 살고, 주고, 감사하고, 그 순간에 머물 수 있다.
다가올 또 다른 시간도 그렇게 그 순간에 머물 수 있다.
그렇게 보내는 순간들이 의미가 있다.
결국에는 상실감 속에서 아무리 힘들어도 의미를 찾으려고만 한다면 찾을 수 있으며 치유가 된다.
나는 인생을 골라 살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을 해보곤 한다.
학창 시절 공부를 하면 1등급을 맞고 연봉이 높은 회사에 취직을 하던지 대우받는 직업을 골라잡아 아무런 갈등 없이 살다가 해피엔딩으로 삶을 마감하면 좋겠다.
그렇지만 노력과 갑작스러운 운에 따라 풍파를 겪기도 하고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잔잔하다가도 롤러코스터를 타기도 한다.
그렇다 인생은 취사선택할 수 없고 예견된 앞 날이 보이다가도 갑작스럽게 바뀌기도 한다.
몇 년 전, 나는 혼자 있을 때 자정에 초인종, 노크, 계속되는 문자와 진동음을 섬찟하게 들은 바 있다.
수신차단을 한 거 같은데 휴대전화의 벨이 울리며 모르는 번호로 걸려왔다.
상대방이 원치 않은 사과를 하기 위해 한밤중에 찾아온 불청객은 현관문 하나로 나뉜 공간에서의 소음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인기척을 최대한 내지 않으려고 했고 걸려오는 전화를 모른 척하기 위해 가까운 지인에게 전화를 이어했다.
그러나 도저히 밖에서 나는 소음으로 인한 두려움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손이 벌벌 떨리곤 했다.
그 전에는 집 앞에 밤새 주차를 해놓고 기다리곤 했다.
그의 방식이 통하지 않으니 그저 강도가 세진 것뿐이다.
불청객의 패턴은 불통을 타개할 수 있는 최후의 방식을 내게 시도했다.
혹시나 찾아올 수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그래서 뉴스에서 본 여성귀가안심동행을 떠올리며 경찰에 문의를 했다.
하지만 그때 서울만 해당되고 대전은 귀갓길 안심서비스의 시행지역이 아니었다.
경찰은 불청객이 찾아왔다면 그때 신고받고 출동할 수 있으며 현관문을 열어주지 않는 게 최우선이라고 했다.
경찰은 신고 뒤 15~20분 정도 뒤에 찾아왔다.
문밖에 나가지 않았지만 약간의 경고를 준 뒤에 끝난 거 같다.
그렇지만 나는 경찰을 부른 조치를 취해놓고는 훗날이 걱정되었다.
갑자기 나타나서 마주하고 보복을 당할까봐.
낮에도 집에 있을 수 없고 밤길도 조심히 다녔다.
가해와 피해는 상대적이고 양면성이 있다.
'나'는 무사하고 '타인'이 악화됨에 따른 죄책감, 미안함이 생기고 '타인'은 무사하고 '나'는 악화됨에 따른 억울함과 분노가 올라온다.
이런 심리적 외상은 부정적인 감정을 처리하기 위해 다시 사고하기 시작한다.
현재의 지점에서 지난 그 시점 이후 1년 이상의 기간이었다.
왜 이런 사람을 만났을까?
왜 이런 사람을 향한 마음을 끊어내지 못했던 걸까?
내가 그 상황을 만든 걸까?
남들에게 해롭게 굴지 않았는데 난 왜 이런 벌을 받을까?
그 일방적이면서 때에 맞지 않은 사과를 받았어야 했을까?
그렇지만 만났다면 또 다른 일이 생기더라도 사과로 무마되지 않을까?
끝없는 왜에 대한 질문을 해댔고 질문의 의도 속에는 자책과 원망이 심어져 있었다.
그냥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차례 공포가 엄습해오면 그 순간이 떠올랐다.
이후집에 혼자 있을 때 택배 배송으로 초인종을 누르는 소리, 예고 없는 노크소리에 불청객이 생각나곤 했다.
1년간 때때로 생각날 때면 혼자서 위의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했지만 알 길이 없었다.
그냥 간단하게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 휴대폰 번호를 바꾸면 될 일 같았지만 그 조차도 악재에 악재가 겹쳐 비상금이 다 떨어질 무렵 겨우 바뀌었다. (삼재였을까? 마의 기간 같았다.)
쓰레기 같은 경험은 썩어 거름이 되어 다시 그걸 자양분 삼아 의미의 씨앗이 머금고 꽃을 피우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나는 거름으로 만드는 시간이 사계절 이상이 걸렸다.
나는 불청객을 소개해준 부모님한테 억울함을 풀 수 없었다.
사람 보는 안목이 부족한 '나'라는 사람 자체와 신에게 물어보면 늘 성경에 '사랑'에 관한 복음이 펼쳐지는 순간들이 떠올라 신을 향해 원망하며 분노했다.
다 알고 그냥 묵인한 채 그대로 놔둔 건 방임과 방치와 다름없다고 원망했다.
좀 심하게 그 해는 신은 나의 샌드백이 된 거 같다.
나를 좀 더 사랑한다는 명목 하에 어려운 미션에 임하며 그냥 미라클모닝을 하면서 나락 같은 현실에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다.
훗날이 그때보다 다를 앞날을 준비하며 현실은 이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에게 많이 분노했다.
순간순간 의미를 부여하려고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나는 1년을 다른 곳에서 살고 다시 대전으로 이사를 왔다.
다른 곳의 주거환경, 그 당시 직장, 직장동료, 대상 아동의 어머니에게 적응을 잘하지 못했다.
그 1년은 상처를 발견하고 회복을 위해 그곳에 있었던 거 같다.
대전에서 떠나는 시기와 비슷하게 지금은 거의 같은 직장, 같은 주거지에 산다.
얼추 같지만 조금 달라졌다.
나는 그때와 같은 공간에 살고 있지만 가구 배치를 달리 했다.
어느덧 개정이 되었는지 대전도 안심귀가동행을 알리는 안내판이 길거리에 있다.
그리고 대전으로 돌아온 첫해 가을에 아버지께 불청객의 할머니께서 다시 연결을 바란다며 재주선 연락이 왔다.
그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전처럼 똑같이 되풀이될까 봐 무서웠다.
그 소식은 내가 잘못 잘못 찾은 길을 다시 되돌아와 다시 새로운 전환하는 지점인 기로에 서 있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나는 과거의 선택은 틀린 길이라 생각했고 다시 다른 길로 가고자 다른 선택을 했다.
아! 6장의 '왜'라는 질문에는 조율이라는 의미를 찾았다.
그때에 그 시절 나는 얼굴에 반해 처음으로 아주 많이 티 나게 좋아했었던 거 같다.
그도 일방적으로 굴어 상처를 주었지만 나도 내 것을 못 챙기면서 남을 챙겼으니 피차 일방적이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태를 구실 삼아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한테 매력적일 수 있었을 거다.
이제 나는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임이 얼마나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심상에 새겼다.
상호 협의 간에 조율을 의식적으로 하려고 노력 중이다.
어설프지만 노력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결이 달라지고 있다.
세상 풍파는 더 다양하고 많다.
익명의 놀이치료사가 자기 사례를 덧대면서 글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치료사로서 훈련이 꽤 길었지만 내 문제엔 객관적인 관점에서 주관적인 입장을 제대로 분리해서 접근하지 못해서 꺼내놓는게 떳떳하지는 않다.
그래도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여기까지 보고 있다면 꺼내놓을 수 없는 순간을 이렇게 글을 통해서든, 누군가에게 털어놓든, 믿고 있는 신에게 통곡을 하던 샌드백 삼아 분노를 터뜨리는 순간들이 당신에게 있음 참 좋겠다.
만약 그누군가가 넋두리 같은 상황을 이렇게 드러낸다면 시간을 정해 들어주거나 함께 기도하거나 수련을 하는 것을 권하기도 한다.
당신은 지금 현실이 고달플 수 있고 그것이 얼마나 계속될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의미를 찾을 것이다.
글을 읽는 누군가의 오늘을,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를 나는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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